
주님 수난 성지 주일 (2020년 4월 5일)
얼마 전에 동기
신부를 만나러 신리 성지에 다녀왔습니다. 신리 성지는 박해시대 때 신앙을 지키며 살아갔던 교우들이 모여있던
곳이며, 조선 교구의 교구장인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님께서 머무셨던 곳이지요. 신리 성지에는 이곳저곳 건물들이 서 있지 않고, 눈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비어 있는 공간들이 많았습니다. 다른 성지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신리 성지 주변을
걸으면서 참 편안했습니다. 그리고 이 비움의 공간 안에 자리한 것은 텅 빈 공허가 아니라 하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어있지만 오히려 가득 채워져 있는 성지가 주님의 사랑을 닮아있다는 생각 또한 들었습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완전함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사람이 되셨지요. 이러한 자기 비움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의 불완전한 인간성 전체를 품어 안으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오늘 복음 말씀에서 분명히 들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생명을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 당신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그리고 이 자기 비움을 통해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마주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채워집니다. 이러한
자기 비움의 사랑을 가장 잘 두드러지는 예는 자녀들을 위한 부모님들의 희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누군가에게
나의 것을 온전히 다 내어줄 때, 그것은 허무함의 늪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와 ‘너’ 모두가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지요. 스스로 내어주고 비울 때, 우리는 가득 채워집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 그러했기에, 우리 신앙인들은 그러한
비움과 낮춤의 삶을 살아가라고 초대받은 이들입니다.
사랑하는 둔산동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1년 중 가장 거룩한 주간인 성주간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번 성주간
동안 짧게라도 시간을 내어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아파하고 고통받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해 시간을 따로 마련하여 기도한다는 것 또한 비우고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기도 시간은 분명 우리와 다른 이들의 영혼을 주님의 사랑으로 채울 것입니다. 아멘.